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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전두환 업적과 과오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

 우선 밝히는 것은 내가 전두환과 관련이 있거나 그를 미화할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을 우선 말하고 넘어가려한다.



나는 다만 전두환 정권 당시의 경제상황과 그가 한국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개인적인 생각을 끄적여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앞에서 당부했듯이 방향은 긍정적인 방향에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가 물론 한국 현대사에 오점을 남긴점도 분명히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분명히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우선 전두환은 '안정속의 성장' 이라는 명제에 철저하게 충실했다.



1979년 2차 오일쇼크가 터지고 한국경제의 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그는 대통령직을 시작했다. 유가는 50% 이상 급등했고 물가 역시 40%가까이 오르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볼때 그는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하더라도 경제적으로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집권을 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정권시절 20년 가까이 지속되어오던 고성장 정책이 아닌 김재익 수석의 3대 모토라고 할 수 있는 안정.자율.개방이라는 명제로 물가안정을 경제의 최우선순위로 끌어올리면서 시작했다.



당시 전통적인 성장론자와 김재익 수석을 중심으로 한 안정론자와의 갈등속에서 전두환은 '인플레 10%이하 달성'이라는 것을 내새우면서 김재익 수석의 손을 들어줬다.



개도국에서 물가를 잡으려면 공공부문의 축소와 통화량 남발 억제 그리고 민간부문은 가격지도책을 보통 실시하는데 전두환 정권하에서는 예산동결과 통화량의 철저한 관리를 통해

서 물가를 잡아나갔다.



정부의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줄여서 전체적인 예산의 동결과 물가안정을 이루어 낸 것이다.



결국 81년 소매가격 13% 도매물가  11%, 82년 소매 4.8% 도매 2.4%83년 소매 2% 도매 -0.8%를 기록하면서 집권 내내 저물가 안정 경제를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전체적인 물가가 안정되자 당시의 기업들 역시 나름대로의 체질개선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물가안정으로 인해서 나머지 다른 거시경제의 안정이 이루어지자 한국 경제는 고성장 저물가를 이루어 낼 수가 있었다.



또한 전두환 정권은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로 무역흑자시대를 만들어낸 대통령이다.

박정희 정권 말기 중화학 공업 투자로 인해서 늘어난 외채를 줄이기 위해서 무역기조를 과거의 물량수출방식에서 경상수지 적자 억제책으로 대외거래 기조를 바꾸어 나갔다.



그리고 3저(저유가,저이율,저환율)시대를 맞이하기 직전인 85년에는 7억달러의 적자를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3저시대가 시작되자 바로 경상수지는 대폭 흑자로 전환되었고 86년 40여억 달러 87년 99억 달러 88년 145억 달러 89년 60억 달러 흑자를 기록하면서 순식간에 외채는 급격히 줄어들게 됩니다.86-89년 사이에 외채는 무려 170억 달러가 줄어들었고, 순외채는 40억 달러로 사실상 채권국의 상태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물론 3저 시대라는 것은 전두환이 의도하지 않은 외부적인 요인이지만 결국 당시의 정권이 그러한 시대적인 흐름을 잘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경제적인 성과를 단순히 3저시대에서 찾는다면 당시 3저호황은 전세계 공통현상이었다. 

그러나 선진국들은 2차 오일쇼크를 벗어나 성장률이 가까스로 회복되고 있었고,

브라질은 오히려 100억불 적자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3저호황때문에라는 말이 먹히려면 모든 나라가 똑같이 두자리수 성장, 한자리수 물가상승, 무역흑자를 동시에 기록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 시기에 저 3가지를 똑같이 달성한 나라는 우리나라 말고는 내가 알고 있기로는 없다.

 

또한 전두환 정권은 미래를 위한 산업정책도 소홀하게 하지 않았다. 현재의 it산업의 기반을 닦은 정권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을 충실히 이어 받아 계속 육성했으며 미래를 위한 산업으로 전자산업과 정보통신사업을 육성했다.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과 오명 장관, 전두환 대통령이 3명이 의기투합하여 전자와 통신사업 육성에 힘을 올렸고,브라운관 산업 유선전화용 교환기 통신케이블 전자교환기 광통신인프라 분야는 비약적으로 이 때 성장을 이룰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8.7%로 매우 우수했고, 거기에 물가는 5%이내로 안정되었다.



전두환 정권 말기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렸던 기사는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그는 재임기간에 성장.물가.국제수지라는 경제정책의 3대 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한 대통령이었다.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1마리의 토끼도 제대로 못 잡아 쩔쩔매는 판에 그는 3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은 것이다. 



그런데도 희한한 것은 이같이 경이로운 업적을 쌓았음에도 그만큼 국민들에게 인기없는 대통령은 일찍이 없었다는 점이다." 라고 썼다고 한다.



그에 대한 정치적인 논의는 뒤로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전두환 정권은 경제분야에서만큼은 확실한 성과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정치적인 과오로 인해서 이러한 경제적인 성과가 모두 묻혀버리기는 했지만...









ps. 전두환 정권의 경제개혁은 전두환이 '당신이 경제대통령이야.'라고 말하면서 전폭적으로 밀어줬던 그의 경제 가정교사였던 김재익 수석의 역할이 컸다. 



김재익 수석은 미국에서 신 고전파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을 수습하려면 금융과 재정을 긴축하고, 수입을 자유화하며, 임금상승은 생산성 증가의 범위 내로 억제하고, 환율과 금리는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경제의 능률 향상을 위해서는 개방과 경쟁이 필수적이고 정부의 간섭은 적어야 한다. 김재익 수석의 정책은 대부분 이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물론 그는 3년만에 아웅산 테러로 인해서 사망했지만 그가 재직하던 3년 동안 그는 제로베이스의 예산 편성, 예산 동결, 미곡 수매가 동결, 통화 긴축, 수입 자유화 같은 정책을 실시해서 전두환 정권의 전체적인 경제기조의 틀을 다짐